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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존재와 시간, 하이데거

by 투투웨즈 2024. 2. 28.

하이데거, 인간의 관계 맺음의 성격차

인간이 다른 존재자들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서 존재자의 존재가 결정됩니다. 인간의 관계 맺음의 성격에 따라 존재자들은 현존성을 지니거나 이념성을 지닙니다. 이런 점에서 존재자들은 이런 인간의 실존에 의해서 관계 맺음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일정한 존재를 지니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현존재란 존재자가 들어와 존재하도록 존재를 열어 주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존재와 시간, 심정성과 이해관계

인간은 실존을 통해서 존재자의 존재를 열어주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이런 실존은 은폐되어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실존이 은폐된 세계가 바로 근대 자연과학의 세계라고 간주합니다. 자연 과학의 세계에서 존재자들은 현전성이라는 존재 범주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앞에 객관적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인간도 예외는 아닙니다. 인간 역시 다른 자연 과학적 대상들처럼 과학적으로 파악됩니다. 생물학적, 심리학적 인간 개념이 바로 그런 겁니다. 자연과학의 세계에서 현전성은 자연스러운 것으로써 원래부터 그런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이 세계에서 존재가 망각되어 있다고 합니다. 

사실 이런 현전성은 그 자체로 실존의 일정한 관계 맺음을 통해서 성립된 것입니다. 그것은 실존의 타락적 기구인 감각에 의해서 성립됩니다. 그러나 감각이 능동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형식 때문에 수동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헤겔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이런 존재자의 현존성이 사실은 실존의 관계 맺음에  의해 생겨난다는 사실이 특정한 관계 맺음에 의해 은폐되어 버립니다. 존재 망각의 근원은 바로 실존의 자기 은폐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실존은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존재자의 존재가 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이는 다시 말해 인간이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관계 맺음 속에 들어가서, 새로운 존재를 열어주는 데 달려있는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관계 맺는 샐존의 근본 기구를 심정성 이해로 파악합니다. 이 기구들은 실존의 타락적 양상을 이끄는 감각에 대립된다는 의미에서 근본적 기구이며, 진정한 관계 맺음의 방식입니다. 양자는 서로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심정성과 이해는 등 근원적으로 실존과 관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심정성은 그때마다 나름대로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이해는 항상 기분에 의해 규정됩니다. 그러므로 양자는 그 밑바닥에서 통일되어 있고, 하이데거는 이 통일성을 '마음씀'으로 규정합니다. 

심정성은 기분을 의미합니다. 기분은 다만 우연적인 변덕스러운 감정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사물의 전체성이 드러나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람들이 많은 방에 들어간다면, 순간적으로 어떤 서먹서먹한 기분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 앞에서 어쩔 줄 모릅니다. 이 서먹서먹함은 사실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상호 관계에서 발생하며, 그 상호 관계의 전체를 단숨에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기분 가운데, 특히 불안이라는 근원적인 기분을 중시합니다. 불안은 어떤 구체적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위협감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자의 전체가 인간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데서 발생하는 기분입니다. 그 이전까지 인간은 자신의 실존을 망각하고, 잊혀진 세계 속에서 친숙한 것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불안의 기분 속에서 친숙한 세계로부터 깨어납니다. 존재자 전체가 이제 낯설어지면서, 지금까지의 세계는 자연스러운 것도 본래부터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견고한 성처럼 강고하게 버티고 있던 자연 과학적 세계의 현전성이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이 불안이라는 기분을 권원적 심정성이라 규정합니다. 

불안

불안이라는 심정성은 실존의 다만 부정적인 측면일 뿐입니다. 그에 반해서 이해는 긍정적인 측면입니다. 하이데거에서 이해란 곧 근원적인 자기 이해입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인간이 가능적 존재임이, 다시 말해서 존재자들의 존재를 열어 주는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임이 밝혀집니다. 이제 이해를 통해 실존은 자신이 실존임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에게서 이해는 동시에 근원적인 진리의 장소입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존재자와 의식의 합일에 있다고 한다면, 이런 진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의식에 대립하는 존재자의 현존성이 사라지고 존재자가 의식과의 통일이 가능한 존재의 영역으로 들어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존재자의 현존성이 전제되는 한, 의식은 항상 존재자에 못 미치며, 그러기에 진리는 성립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존재자에게 새로운 존재의 영역을 열어 주는 것은 무엇인가? 진리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하이데거는 이런 존재의 영역을 열어 주는 것이 이해의 개시성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가능적 존재임을, 즉 존재자의 존재를 열어 주는 개시성임을 자각하게 됨으로써 존재자는 인간의 개시성의 영역으로 끌어들여집니다. 이 개시성의 영역에서 존재자는 의식에 대립하는 은폐적 존재, 즉 현전성의 존재 영역을 벗어나, 즉 탈 은폐로서 진리의 존재 영역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실존의 개시성 앞에 존재자는 자기를 감춤 없이 환하게 드러낸다고 하겠습니다.

하이데거에서 실존에 등근원적으로 관련되는 심정성과 이해의 개념은 거슬러 올라가면 낭만주의의 순수 주관성 개념과 닮았습니다. 낭만주의는 인간에게 종교적 경건성이라든가 예술의 매혹적 황홀감과 같은 순수 주관성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이 순수 주관성 속에서 인간과 자연은 하나로 통일됩니다. 자연은 자기의 고립된 규정을 벗어나며 동시에 인간에 대립되는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벗어나서, 모든 자연은 서로서로 그리고 인간과 더불어 하나로 통일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가 바로 근원적인 낭만의 세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