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지속의 지성, 창조적 진화 앙리 베르크손

by 투투웨즈 2024. 2. 28.

앙리 베르크손의 철학은 지속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성은 그 풍부한 실재로부터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을 추상해 내고 그것을 자신에게 편리한 형태로 공간 속에 배치하며, 그 추상물은 하나의 '사물'로서 실체화합니다. 지성의 그러한 습관은 너무나 철두철미하여 그의 눈앞에서 전개되는 공간 운동마저도 운동 자체는 사상하고 그것의 공간적인 측면, 즉 죽어있는 공간적 궤적만을 보며, 거기서도 운동체를 추상해 내어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하나의 '사물'인 운동체가 그 공간의 궤적을 따라 운동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정작 실재하는 것은 운동 자체이며, 운동체와 운동의 궤적은 지성의 표면적 추출물에 불과합니다. 

 

종래의 진화론들은 모두 이미 형성된 종들의 행태를 중심으로 그것들을 조각조각 맞춤으로써 진화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돌연변이설은 그때그때의 여러 돌연변이 조각이 모여서 일정한 진화를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알파벳을 모으다 보면 셰익스피어의 시가 나오리라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형태란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생명의 추진력이 이미 그 운동을 끝낸 결과물, 즉 하나의 정지된 것에 불과하며, 그것들을 조립하여 진화의 운동 자체를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창조적 진화는 생명이란 필연의 법칙이다

창조적 진화는 베르크손에게 있어 생명이란 필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물질계의 '내려가는' 힘을 거슬러 '올라가는' 어떤 힘 또는 흐름입니다. 물질계가 열역학 제2 법칙을 따르고 엔트로피가 '무질서도'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바로 물질계가 생명과는 반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질서하다는 것은 오직 생명 일반에 대하여 그렇다는 것이지 물질은 자신의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 그 자체로는 무질서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아주 원시적인 형태에서부터 물질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개체의 성격을 띠며 점점 복잡해질수록 활동성과 자유, 즉 비결정성의 폭을 넓혀가는 어떤 흐름입니다. 사실 생물체의 감각 기관이 복잡해진다는 것은 선택의 폭이 그만큼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생명이 어떤 흐름이라는 것은 각각의 개체는 죽어갈지 모르겠지만 생명 자체는 개체에서 개체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가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그 흐름을 거슬러 올라갔을 때, 그것의 원천에 해당하는 어떤 힘이 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물론 생명의 원천이라 불러도 좋지만 베르크손은 특의 '생의 비약'이라 부릅니다. 

이 생명의 원천의 입장에서 보면, 진화는 마치 쇠줄 밥 더미를 뚫고 들어가는 손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모든 종이나 개체의 탄생은 손의 운동처럼 '생의 비약'의 불가분적 운동에 의해 단번에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불가분적이기 때문에 나누면 이미 다른 운동이 되어 버립니다. 수많은 형태의 종들은 각각 다른 운동에 의해 손의 힘과 줄의 저항 사이에 이루어진 균형, 즉 손이 멈춘 상태의 모습이며, 그 모두는 다 완전한 유기체를 이룹니다. 다만 손의 운동과 생명의 약동이 다른 점은 전자는 보이지만 후자는 어떤 힘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기계론은 마치 줄밥이 저절로 변하여 일정한 모습을 가진 생명이 탄생하는 것처럼 생각하며, 목적론은 손의 자발적 운동이 아닌 그 외부에서 줄밥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또 돌연변이 이론은 손의 운동이 멈추면 이미 다른 운동, 즉 다른 종이나 개체임을 알지 못하고 조금 조금씩의 운동을 합하여 더 큰 변이가 나오는 것으로 생각한다. 진화의 각각의 종은 생명의 힘이 물질계의 저항을 뚫고 그때그때 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간 여러 자국들입니다. 

그렇다면 '생의 비약'이란 무슨 뜻인가? 생명은 물질과 만나서 물질 속에서 자신을 구현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필연적 법칙이 지배하는 물질을 극복하고 거기에 비결정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비결정적이라는 말은 곧 비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정적인 것은 필연의 사슬을 따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진행되는 것이지만 비결정적인 것은 다음 순간에 무엇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으며 전건에 없던 것이 후건에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약하는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항상 유지하는 비약이다. '생의 비약'이란 바로 그러한 사태를 표현한 말이다. 비약은 비약이지만 '생'이라는 자기 동일성은 유지하는 비약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적 진화'라는 책 제목도 다른 뜻이 아닙니다. 생을 세로로 잘라 보면 매 순간 전건에 없던 것이 후건에 나타나는 새로운 것의 '창조'이지만, 가로로 잘라 보면 그 창조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진화'라는 것입니다. 생은 결국 끊임없이 자신임을 떠맡으면서 이미 자신을 넘어서 있다는, 전통 형이상학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존재 방식을 가진 존재자임을 베르크손은 밝혀내었습니다. 

 

생명이 물질과 만날 때, 처음부터 자신 능력을 한꺼번에 다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의 여러 노선을 따라 점차적으로 실현합니다. 생명 자체의 입장으로 보면 하나의 생명이 그 모든 능력을 한 몸에 지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죽지 않고 살아 나가는 것이 가장 좋을 겁니다. 그러나 물질의 저항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므로, 상황에 따라 여러 길로 나뉘고, 또 각 노선 내부에서도, 각 종 내부에서도 각각의 개체로 나뉘어서 개체는 죽지만 종 자체는 이어지는 방식으로 그 연속성을 유지합니다. 

 

인간의 지성은 결국 도구를 제작하며 살게 되어 있는 존재자에게 주어진 진화의 노선 위에 있는 한 가지 능력입니다. 도구는 물질을 가공함으로써 이루어지므로 지성은 물질의 본성에 따르는 공간적 사유에 익숙하지 않을 수 없고, 우리가 공간과는 정반대인 지속, 즉 진정한 운동을 그처럼 포착하기 어려운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